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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낯선 곳에서 만난 낯익은 그들

'길위의 삶'을 망서리게 만들었던 것 중 하나가 오랜 이웃들과의 헤어짐이었지요. 

하지만 이젠 더 이상 외롭지 않습니다. 우리 가는 곳 어디에서나 그들이 먼저 와서 기다리고 있음을 알기 때문입니다. 


오레곤를 향해 남행하던 중 우연히 들렸던 낯선 도시 -롱뷰.Longview.WA.

도심의 평화로운 호숫가에서 스텔쓰캠핑 중 생긴 일입니다.  


낯선 곳의 낯익은 그들 

원래 계획은 없었다. 

지나다가 해가 지길래 그냥 멈춘 낯선 타운이었다. 

기왕 닻을 내린 김에 시티센터의 고풍스런 라이브하버에서 이틀간  면벽수행을 했다. 그러면서도 두어 블럭 떨어진 데 그런 멋진 호수가 있는 줄은 떠나기로 한 날 오후 늦게까지도 몰랐었다. 


화사한 날씨에 허리도 펼겸 산책삼아 주변을 돌다 발견한 그곳. 

새들이 저저귀고 아이들이 까르르웃고 주변의 집들도 예쁘고 평화롭기 그지없다. 

아름드리 나무에 둘러싸인 긴 호수는 걸어보니 그 길이가 거의 4마일은 족히 될 듯. 브릿쥐들이 일정 간격으로 걸려 있어 처음엔 호수아닌 강으로 착각.



그 오후, 지금은 기억 안나는 어떤 사소한 일로 조금 삐쳐있던 그대. 나의 회유에 마지못해 목줄 단 강아지마냥 억지로 따라나선, 원래는 찬바람이 쌩쌩부는 산책길. 


그런데 석양에 물든 호수공원을 반바퀴 쯤 돌았을까 어느새 그대는 내 손을 잡고 깔깔대며 웃고 있었다. 한시간도 채 안걸려 개닭보듯 중년부부 모습에서 늦바람에 타오르는 불륜커플 닭살 모드로 급전환된건 완전히 호수의 아름다운 정취 덕분....


되돌아 오는 길 느릿느릿 손잡고 걸으며  사진도 박고, 오가는 주민, 마주친 여행자들과 인사도 나누고, 오리알 찾아 후라이 해 먹자고 덤불 밑을 뒤지기도 하고... 




호수이름은 인디언말로서 발음이 좀 어렵다- 레익사카자웨아....


길가 안내문에 의하면 서부개척의 선구자들-루이스 앤 클락과 얽힌 인디언 여성의 이름으로 전설따라 삼천리 믿거나 말거나 스토리가 얽힌 그런 유서깊은 지역.    

이곳 정취에 반해 우린 만장일치로 일정을 변경 호변에서 하룻밤 스텔쓰 분닥을 하기로 했다. 


하여 

언제나처럼,  

오버나잇을 위한 세이프하버 확보 전에 일단  저녁부터 해결하고 

다시 움직여야 하므로. 

잠수함을  전망 좋은 곳으로 잠시 옮겼다.  



멋진 정찬이 석양에 물든 잔디공원을 배경으로 차려지고 

식후, 그대가 잠시 뒤편에서 무얼 하는 동안 혼자 캡틴의자에 앉아 어둠이 내리는 파크를 굽어보며 

차한잔을 폼나게 마시던 로변철 함장. 


거기까진 완벽한 그림 그 자체.


헌데 바로 그때였다- 어쩐지 무언가 뒤에서 덥쳐오는 듯한, 등골 서늘한 느낌이 든건. 

 

얼핏 뒷미러를 보니 어, 저차 왜 저래, 

거울 속에 엄청난 속도로 돌진하는 시커먼 물체가 시야에 포착된다. 그런데 그렇게 한가하던 길에 하필 반대편 차선에도 큰 차들이 연이어 우리편을 향해 오는 중.  


어... 다들 너무 붙어서 너무 빨리들 오네....생각하는 그 순간. 


퍽- 쨍그랑! 


뒤에서 달려온 모토홈이 기어이 일을 냈다.  

맥놓고 정차 중인 '아타보이'의 조종석편 미러를 퍽 깨부수며 스쳐 지나 간 것이다. 


거의 반사적으로 크락션을 빠앙- 길게 누르며 밖으로 튀어 나갔다. 


끼이익-

놀란 모토홈도 급정거. 운전자가 허둥지둥 뛰어 나온다. 



근데 어랍쇼, 이게 누구야, 

어둠을 뚫고 나타난 몰골이 눈에 익다. 이런, 아까 산책하다 만나 길에서 한참 덕담을 나누었던 바로 그 양반- 이 동네 토박이로 야옹이 한마리 데리고 폐차직전 모토홈에서 혼자 돌아다니며 산다는, 

보브란 이름의 늙은 히피. 


스쳐 지난 작은 인연이 순식간에 악연으로 돌변하는 순간. 


보브는 나에겐 너무나 미안해 하면서 동시에 그 미안을 덜어 보잔 심산으로 

육두문자를 섞어 중앙선에 너무 근접해 마주 지나간 차들 욕을 해댄다. 


대략 난감 상황. 


이 정도 경미한 일에 폴리스 부르기도 뭐하고 


보브의 '다음날 아침 일찍 수리점에서 만나자'는 말을 믿어 보기로 했다. 면허증과 라이선스플레이트 사진만 한장씩 찍고 보낸 것이다.   


하지만 재삼 재사 정중한 사과의 말을 남기며 돌아서는 그의 얼굴 위로 0.1초의 순간 내비친 묘한 표정...에서 나는 그가 다시 내 앞에 나타나지 않으리란 불길한 예감의 엄습을 어쩌지 못했다. 


지금도 모르겠다. 그때 헤이,보브, 잠깐만! 하려다 만 이유를... 


이런 경우 반드시 현장에서 911에 콜, 패트롤을 불러 폴리스리포트를 해야 함을 집사람과 아이들에게도 누차 교육시켰고 그 누구보다 잘 알면서도 말이다.  



이튿날 아침.


마침 호수변에 커다란 잠수함 전문 정비소를 발견 깨진 미러 견적을 받으러 갔다.  

그래도 혹시나 했지만 역시나 보브는 약속 시간 9시 너머 10시가 돼서도 연락두절, 

꿩궈먹은 소식이다.  -이상하다, 근래들어 갈수록 꿈이나 불길한 예감, 사람에 대한 직감이 그대로 맞아 떨어진다. 무서울 정도... 이건 뭘까? 미아리 가서 방석이나 깔까....


홈리스 아닌 홈리스라던 그가 돈을 구하지 못해서겠지 애써 이해하려 하면서도 한편 

인간적 신뢰를 돈 몇푼에 저버린 그 미제 소갈머리가 야속하다.    


물좋고 인심좋은 마을- 롱뷰에 대한 우리의 첫인상이 미러조각과 더불어 깨져 버리려 할 즈음....


이건 또 뭐지? 

우리앞에 등장하는 RV전문정비소의 두 여인. 

-이 대목에서 클린트이스트우드의 The Good, The Bad And The Ugly가 배경음악으로 

깔려야 되는데....그런거 할 줄 모른다....


정비소 오너의 와이프와 매니저(즉 사진 속 넉넉하신 몸과 마음의 두 아주머님)이 우릴 영 헷갈리게 만든다. 


어찌나 우리에게 살갑게 친절들 하신지. 그 바쁜 와중에 짜증은 커녕 싫은 티 한번 안내고,  미러 새로 다는 김에 이것저것 두루 고치고 정비하려는, 우리의 다양한 질문에 성심성의껏 답해주고 테크니션 불러 일일이 보여주며 설명해주고 돈도 안될 자질구레한 문제들까지 여기저기 파트샵에 전화해 에스티메이션 내주고...


이건 삐지려는 우리 마음을 읽고는 마치 부디 우리 동네 나쁘게 보지 말아 달라고 기를 쓰는 듯 하다. 


보통 정비소들이 지나가는 여행자들에게 보이는 행태는 예외없다보면 된다.  덤터기 씌우고 불친절하고.... 다시 볼 일 없다 이거지. 


그런데 이런 천사표 정비소는 와싱턴주 시골 롱뷰우에서 첨 본다. 

이들로 인해 별 하나로 추락하려던 이 동네에 대한 리뷰점수가 별 다섯으로 환원된다.  



어느새 그대는 사람 좋은 매니저와 오랜친구사이라도 되는듯 아들의 자전거여행담, 손가락 신경통 이야기(아줌마도 같은 증상), ...등으로 이어지는 수다를 떠는 중.  


그런데 이런 미안한 일이...우릴 위해 두분이 한시간 넘게 허비했는데 아무래도 여기선 수리가 힘들겠단 결론. 

휴가철 시작되었고 메모리얼할리데이 연휴 등이 겹친데다가 부품(미러)이 인디애나 공장에서 오는데 

무려 1주일이 걸린다는 것. 하여 다음주 포트랜드의 큰 수리점에 가서 한꺼번에 다 고치는게 맞다는 결론에 이른 것이다.  


헌데 아줌마들, 열 받으실 법도 한데 여전히 미소를 잃지 않는다. 우리 상황을 충분히 이해한다며 견적서를 새로 복사해서 친절하게 건네준다. 



이거 한강에서 뺨맞고 남산에서 민폐끼치는 상황...


그런데 그냥 이대로 롱뷰를 떠나자니 좀 그렇다.  

인구 몇만이나 될래나 이 좁은 바닥 몇바퀴 돌면 치사한 돈 몇푼에 숨어버린 히피 할배 잡을 수도 있을 거 같은데... 찾아서 부품값이라도 받고 훈계라도 한마디 해주고 싶다.  


큰 사고 안나고 이 정도 작은 손실로 액땜한거라 생각하고 감사하는 마음으로 용서하고 그냥 가자는 그대를 살살 달래 일단 근처 파출소를 찾았다. 이 인간 좀 찾아 달라 떼 좀 써볼 심산으로. 


근데 하필 점심시간.  문이 걸렸네. 음, 그래 역시 하늘이 그냥 잊고 가라는 말씀이신가보다 아멘하며 후리웨이를 타려고 하는데, 


건장한 체구의 대머리 순사 한명이 순찰차를 세운채 근처 상점 앞에 서 있는게 시야에 포착.   


끼이익, 급정거. 


"순사 양반 오래 머물수 없는 여행자라 그러는데 이 작자 좀 찾아 수리비 좀 받아주오"  

뭔 일인가 귀를 쫑긋하고 듣는 리스란 명찰의 순사에게 자초지종을 설명했다. 


접촉사고 후 운전자가  일단 내려서 신상정보를 알려주고 보상을 약속하고 간 케이스라 이건 누가봐도 힛앤런(뺑소니)도 아니고 뭣도 아니다. 경찰이 개입할 여지가 없다. 

당사자들이 알아서 스몰클레임을 걸던지 말던지 해결할 일일 뿐이다. 


알지만 그래도 동네경찰에게 하소연이라도 하고 나면 떠나는 속이 좀 풀릴 것 같았다. 


그런데 그의 반응이 뜻밖이다.  

"저런 그런 일을 당하셨다니 우리가 힘닿는데까지 도와드리겠다. 

면허증 정보가 있으니 일단 순찰차로 가서 컴퓨터 조회부터 해보고 거기서 부터 시작하자"  


진지하다 못해 지나치게 심각하다. 

이거 뭐 살인사건 신고도 아닌데....오히려 내가 좀 어리둥절. 


휄라니케이스만으로도 바쁜 NYPD나 LAPD 등 대도시 캅이었다면 

뭐 이런 일로 바쁜데 구찮게 이러시냐는 핀잔이나 안먹었으면 다행이었을 xj.  




 

컴퓨터로 차적조회, 면허증으로 인적/주소조회를 한참 하고 누군가와도 통화를 하고 난  

경찰관 리스. 


차주가 다른사람으로 나오는데 전화를 안받는다. 

사람(보브)은 전과가 없는데 주소지가 범죄(마약)에 연루된 일이 많은 골아픈 집이다. 

.....라며 멀지 않으니 일단 그가 있을 만한 연고지들을 같이 찾아 다녀 보자....고 한다. 


그의 진지한 자세에 혹시나 덕분에 이 인간 잡아서 얼마라도 받아 낼수 있지 않을까 

하는 일말의 희망이 생겼다. 



연고지 탐문 중. 안에 사람이 있는 듯도 한데 반응이 없다. 



수리비 받게 해주려고 온동네를 뒤지고 다닌 서전트 리스의 과잉(?)친절에 감동 먹으며 

순찰차 뒤를 졸졸 따라 다니는 중. 



"민중의 지팡이"란 이런것이다- 

그 정수를 유감없이 보여준 시골 순사-서전트  '테리 리스'



한나절 시간만 낭비하고 깨진 미러 값은 결국 못 받았지만, 


정비소의 두여인, 리스 경관이 보여준 나그네에 베푼 따뜻한 관심과 친절로 

어느새 언짢았던 마음은 눈녹듯 사라지고 


The Good, The Bad And The Ugly.....

낯선 곳에도 역시 낯익은 이런 저런 얼굴의 비스한 인간들이 살고 있음을 

새삼 재확인하면서..... 


다시 돛을 올린 잠수함 아타보이호.

진소리도 경쾌하게 포트랜트를 향해 기수를 돌렸다.   


사진부터 주욱 올리고 그에 맞춰서 글을 쓰는 식으로 하니까 

이런 사소한 일상 이야기를 이렇게나 빨리, 길게도 쓸 수 있음에 스스로 감탄합니다. 


성의 없이 쎌카로 이럴 것이 아니라 어서 적당한 카메라를 하나 사야하는데 구차니즘으로...


그간 녹슨 머리에 기름도 좀 더 치고 장비도 보강하고.....내년 2015년부터는 본격적인 

컨텐츠크리에이팅, 인스피레이셔날 트레블로깅을 시작해 볼 생각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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